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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레와따 사야도 2011년 한국 집중수행 법문

·날짜: 7월9일

·법사: 우 레와따 사야도

·통역: 담마다야다 스님

오늘은 한국 파욱지구 수련회에서 법문을 하는 날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첫 법문 하는 날에 흥미로운 법문을 하고자 합니다. 그 법문의 이름의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부처님을 뵙고 싶습니까? 법문의 이름은 부처님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법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부처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빠리닙빠나, 열반을 실현하셨는데 요즘 와서 부처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을 뵙고 싶습니까?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고 싶으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셔야 됩니다. 저는 이 법문을 왁깔리 장로의 이야기에 근거해서 법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법문은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사원, 죽림정사에 거주하고 계실 때 하셨습니다. 예, 우리는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빠리닙빠나를 실현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빠리닙빠나를 실현하신 부처님을 어떻게 우리가 뵐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것을 알기 위해서 왁깔리 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누가 부처님을 뵐 수 있고 누가 뵐 수 없는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왁깔리 존자를 아십니까? 왁깔리 존자는 사왓티시에 사는 브라흐민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처님께서 시내로 탁발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때 그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외모에 아주 깊게 인상을 받았습니다.

같은 시간에 그는 부처님에게 아주 깊은 애정 내지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고, 아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곁에 머물고 싶어서 출가를 요청했습니다. 그의 출가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처님 곁에 머물고 싶어서입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부처님을 직접 뵙는다면 부처님 곁에 머물고 싶어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주 깊게 사모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는 부처님 곁에 머물고 싶어서 출가를 요청했습니다.

비구로서 왁깔리 존자는 항상 부처님 곁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구의 다른 의무들을 이행하는데 관심이 없었고 선정 수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왁깔리여,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대는 선정을 수행해야 합니다. 진실로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 법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를 떠나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직 법을 보는 사람만이 나를 본다. 법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보지 못한다. 여러분 부처님을 뵙고 싶습니까?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셔야 하십니까? 대답이 무엇입니까? 안들립니다. (웃음)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법을 보셔야 합니다. 법을 본 후에만 여러분은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왁깔리 존자가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그대는 나를 보지 못한다 하십니다. 앞에 부처님 이십니까? 부처님 불상입니다. 진짜 부처님은 아닙니다.

보디삿따, 보살로서 싯따르따 왕자는 같은 몸이지만 아직 부처님은 아닙니다. 깨달은 후에만, 법을 통찰한 후에만 법이 함께 있는 그 분이 부처님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아주 용모가 수려하시고 필적할 사람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신들, 그리고 범천, 브라마 이 존재들도 아주 아름답고 용모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용모에는 비교할 바가 안됩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왁깔리 존자가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에 아주 인상이 깊었다는 것을 보십니다. 부처님의 아름다운 외모는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요즘 여러분들, 아마 아름다운 여인들을 많이 볼 것입니다. 하지만 번뇌를 가진 여인들입니다. 번뇌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번뇌 없이 완벽한 외모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 분을 본 사람은 누구나 인상이 깊어집니다.

불법승에 신심이 있는 사람들은 단지 부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부처님의 외모, 그것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법을 통찰하신 부처님, 그것이 법을 통찰하는 것이 부처님을 나타냅니다. 만일 현재 이 순간에 부처님께서 살아 계신다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만일에 법을 통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법을 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직 법을 보는 자만이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법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신다고 여겨집니다.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법을 반드시 보셔야 합니다. 우리 보디삿따, 보살께서 사성제를 통찰한 후에만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아라한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은 사성제를 깨달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사성제를 통찰하신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사성제를 통찰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사성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분은 예, 어떤 분은 아닙니다(라고 하시네요) 이제 여러분들에게 사성제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 사성제입니다. 첫번째 사성제가 무엇입니까?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은 분들이 아실거고 몇몇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세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네번째 사성제, 사성제의 네번째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성인이 된 분들, 도와 과를 성취한 분들은 사성제를 깨달으신 분들입니다. 법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은 사성제를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성제를 알고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성제를 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신다면 사성제를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 부처님은 뵙고 싶어 하고 사성제를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을 뵐 수 없습니다. 사성제를 알고 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상윳따니까야 경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집중력을 닦아라. 집중력을 갖춘 비구는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빨리어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빨리어) 비구들이여, 집중력을 계발해라. 집중력을 계발한 비구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사성제에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 이것은 팔정도로 정의되어 진다. 여러분 팔정도 아십니까? 팔정도가 무엇입니까?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행위, 바른 말,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삼매입니다.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바른 삼매, 바른 선정입니다. 바른 삼매, 바른 선정이 무엇입니까?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을 바른 사마디, 바른 선정, 바른 삼매라고 합니다. 겐지스강 아십니까? 갠지스강처럼 사선정을 계발하고 연마하는 비구는 닙빠나, 열반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향하고 낸다.

누구의 마음이 열반으로 기웁니까? 네가지 선정을 계발하고 연마하는 비구는 닙빠나로 마음을 기울이 향하고 낸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네가지 선정을 계발하고 연마하지 않는 비구는 닙빠나, 열반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향하고 내지 않는다. 이것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직 법을 보는 사람만이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법은 닙빠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닙빠나, 열반을 보기 위해서 비구들이여, 선정을 닦아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사마디를 완벽하게 계발함이 없이 완벽한 지혜를 이룬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정을 완성함이 없이 지혜를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위빠사나입니다. 여러분 부처님을 믿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날부터 마지막 열반에 이르기까지 나는 많은 법들을 나누고 설명을 했다. 그 모든 법들은 내가 말한 것처럼 진리다. 모든 그런 법들은 내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진리다.

부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우 레와따 반떼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을 믿으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마디를 완성함이 없이 지혜를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의 인용 역시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정을 완성함이 없이 족쇄를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족쇄를 버리지 않고 닙빠나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행을 하는 주 목적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선정을 말씀하지 않고 족쇄, 족쇄는 번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족쇄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족쇄를 버리지 않고 닙빠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러분 수따빠나, 수다원 아십니까? 누가 수다원입니까? 첫번째 도와 과를 성취한 분들을 쑤따바나 수다원을 성취한 분이라고 합니다. 이 첫번째 도와 과는 유신견, 의심, 종교적 의식, 의례에 대한 애착을 제거합니다.

우리는 첫번째 도와 과를 성취하게 되면 탐욕, 사견 무리를 제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를 제거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첫번째 도와 과는 무지와 함께 하는 의심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번째 도와 과는 의심을 제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식 의례에 대한 애착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삼매, 선정을 완성하지 않고 번뇌를 버릴 수 없다고,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족쇄들을 버리지 않고 닙빠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처님께서는 원하실 때마다 도와 과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닙빠나는 궁극적인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습니다. 닙빠나는 아주 평화롭고 숭고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원하실 때마다 항상 닙빠나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닙빠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 부처님께서는 닙빠나를 본다. 오, 나는 닙빠나를 본다. 오, 나는 부처님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께서는 닙빠나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께서는 닙빠나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디, 선정을 완성하지 않고 누구도 닙빠나를 볼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의 인용 역시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본 것입니다. 바른 삼매를 갖춘 사람은 이런 희망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른 삼매를 갖춘 사람은 이런 희망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없다.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바른 삼매를 갖춘 사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본성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으십니까? 삼매, 선정(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른 인용 역시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나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소멸한다. 번뇌의 소멸은 초선정,이선정,삼선정에서 팔선정에 의지한다. 여러분 팔선정 아십니까?

여러분께서 흰색까시나 사선정을 수행했다고 가정해봅시다. 흰색까시나 사선정을 마치고 무색계 선정을 하신다면 무색계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흰색까시나 사선정,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은 색계의 선정, 색계의 사선정이라고 부릅니다. 무색계에도 네가지 선정이 있습니다. 첫번째 무색계 선정, 두번째 무색계 선정, 세번째 무색계 선정, 네번째 무색계 선정을 합하면 여덟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팔선정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 믿습니까? 다음 인용은 법구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선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선정이 부족한 사람은 지혜를 이룰 수 없다. 지혜뿐 아니라 선정력도 갖춘 사람, 그 사람은 진실로 닙빠나에 근접해 있다. 지혜 뿐 아니라 선정력을 갖춘 사람, 그 사람은 진실로 열반에 가까이 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지혜 뿐 아니라 집중력 선정을 갖춘 사람은 진실로 부처님을 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뵙고 싶습니까? 여러분,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은 위빠사나의 지혜를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 뿐 아니라 선정력을 갖춘 사람은 진실로 열반에 가까이 있다. 다른 인용 역시 앙굿따라 니까야에 있습니다. 바른 삼매가 부족한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로 볼 수 없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파괴된다. 이렇게 돼 있는데, 누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파괴합니까? 부처님께서 바른 삼매가 부족한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파괴 내지 사라지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열정을 쫓아 버리고 사라지게 한다. 이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파괴된다. 이것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열정을 사라지게 하는, 누가 열정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못하게 합니까? 파괴합니까? 바른 삼매가 부족한 사람은 열정을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을 파괴 내지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 바른 삼매가 부족한 사람은 해탈, 해방 기회를 파괴한다. 여러분 해탈을 원하십니까? 여러분께서 해탈을 원하신다면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바른 삼매가 부족한 사람은 해탈의 기회가 사라집니다.

다른 인용의 하나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나옵니다. 비구들이여, 조건 지어지지 않은 법, 즉 닙빠나,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조건 지어지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부른다.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우 레와따 스님입니까? 부처님입니까? 여러분 아시겠죠? 아주 중요합니다. 다음 인용은 상윳따니까야에서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계발한 비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

마지막 인용은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중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집중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위빨리의 의미는 집중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부처님을 봅니까? 법을 보는 사람 부처님을 봅니다. 법을 못 보는 사람 부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누가 법을 볼 수 있습니까? 집중력을 계발한 사람만이 법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다시피, 왁깔리 존자가 출가한 후에 부처님 곁에 있었지만 전혀 집중력 수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왁깔리 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다. 그대는 집중력 수행을 해야 한다. 진실로 법을 보는 사람, 나를 본다. 법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왁깔리 존자가 집중력 수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왁깔리여, 나를 떠나 거라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집중력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대는 나를 떠나도록 하라. 왁깔리 존자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주 암울했습니다. 우울해졌습니다. 그는 부처님 명령대로 떠났습니다. 그가 그 다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 독수리공, 영축산 꼭대기에 올라서 뛰어 내려서 자살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독수리공에 올랐습니다. 왁깔리 존자의 큰 슬픔과 실의에 빠진 것을 잘 아는 부처님께서는 왁깔리 존자의 깊은 슬픔과 낙담으로 인해서 그가 도를 성취하는 기회를 잃어 버릴 지 않을까 숙고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광명을 나투셔서 빛을 왁깔리 존자에게 보내서 왁깔리 존자가 부처님을 느끼도록 하셨고, 왁깔리 존자에 부처님께서 나타난 것처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옆에 계시자 왁깔리존자는 그의 모든 슬픔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는 생기가 살아났고 기운이 총총해졌습니다. 그에게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주 희열을 느끼고 헌신을 하는 비구는 평온함, 조건 지어지지 않는 것, 더 없이 행복함. 열반을 실현할 것이다. 이 법문이 끝나자 왁깔리 존자는 아라한을 성취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라한이 되신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왁깔리 존자와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법을 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는 수단 내지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4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에 존재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첫번째 두번째 타입의 사람들은 없습니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목갈라나 존자와 사리뿟다 존자께서 아사씨 존자로부터 아주 짧은 게송을 듣고 법을 깨달았습니다. 그 게송을 듣고 싶습니까? 아하라는 말 하기 전에 두 분이 수다원이 됐습니다. 지금 수다원이 되신 분 있습니까? 여러분 만족하지 않는다면, 한번 더 이렇게 게송을 읊겠습니다. 그런데 (듣고)수다원이 되신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에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초전법륜경 아십니까? 부처님께서 첫번째로 설하신 경, 초전법륜경입니다. 제가 초전법륜경을 지금 낭송한다면 그래도 여러분께서 수다원이 되실 분이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을 아주 간략하게 듣는 것, 상세하게 법문을 듣는 것으로 닙빠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세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단계적으로 수행을 해서 닙빠나, 열반을 실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현재에는 아마 세번째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몇 년 한국에 올때마다 집중력을 계발할 수 있는 바라밀이 있는 수행자들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반복하겠습니다. 좋은 바라밀이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바른 삼매, 바른 선정이 있는 사람은 이런 바람, 희망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은 바른 삼매를 가진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본성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수행을 단계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세가지 훈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계를 준수하는 훈련, 집중력을 닦는 훈련, 지혜를 계발하는 훈련입니다. 이 세번째 종류의 사람들이 계정혜를 체계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이번 생애 법을 깨닫고 닙빠나를 실현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고 싶다면 이 세가지 훈련을 단계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법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부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요즘 저는 이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스승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자기 스승들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열반을 깨닫기 위해서 집중력이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따를 것입니까? 들을 것입니까?

여러분께서 부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집중력 없이 볼 수 있습니까? 집중력이 없으면 아무도 닙빠나 열반을 못 봅니다. 일을 하지 못합니다. 설사 우리가 부처님을 눈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뾰족지붕경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뾰족집의 아래층을 짓지 않고 위층을 지으리라 하면 가능한가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식으로 누군가가 사성제를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리라라고 말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식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아래층을 짓고 위층을 지으리라 하면 가능한가? 같은 식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사성제를 통찰한 후에 괴로움을 종식시키리라 한다면 이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사성제를 통찰한 후에 우리는 괴로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성제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집중력을 계발하여라. 집중력을 계발한 비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하십니다. 그러면 그대가 집중력을 계발한다면 무엇을 알고 보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은 사성제를 알고 볼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알고 보기 위해서 집중력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성제를 알고 본다는 것은 부처님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사성제를 알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알고 보기 위해서, 부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믿으십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실 것입니까? 예, 여러분께서 우레와따 스님을 믿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법과 사람을 구별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빨리어와 영어를 말씀하니까 의아해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법과 사람을 구별해야겠습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 어디에 의지합니까? 법에 의지합니까? 사람에 의지합니까? 정직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법에 의지할 것인 가 사람에 의지할 것인가 생각하는 방식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법과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부처님과 법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법과 부처님은 같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사람으로서 의지할 수 있고, 법으로서 의지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완벽하신 분이기 때문에, 말씀하는 것 중에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항상 진리만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법과 부처님은 항상 함께 합니다.

현재 법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을 대표해서 사람으로서 그 사람, 그녀가 법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말하는 사람, 부처님께서 하신 설명을 설명하는 사람을 법을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법을 알고 보기를 원한다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그때만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을 하시기 전에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선택하는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아주 잘 알려진 유명한 비구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이렇게 들었다 했을 때 받아 들이는데 서두르지 마라. 나의 가르침과 비교해서 합당하다면 받아 들이고, 나의 가르침에 합당하지 않다면 거절하여라.

그래서 우리는 가르침을 바르지 않은 가르침을 거절하고 바른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충분히 용기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무슨 말을 듣든지 간에 서두르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받아 들이고 거절하는데 있어서 서두르지 마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과 비교한 다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합당하다면 받아 들이고 합당 하지 않다면 거절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복지를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좋아해서 받아 들이고 싫어해서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법을 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의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법에 의지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의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법에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향상시킬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시킬 시간이 있습니다. 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늦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은 부처님을 보기 위해서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것이 많습니다. 끝없는 법문이 될 것 같은데, 여기서 마쳐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성제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야 되고 수행을 어떻게 하는지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그 설명을 들은 후에만 여러분께서 어떻게 부처님을 배울 수 있을 지 알게 될 것입니다.

법을 보는 사람만이 부처님을 봅니다. 법을 보는 사람, 그 사람은 어디 있든지 간에 부처님을 봅니다. 여러분께서 부처님께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불상을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을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부처님을 봅니다. 그래서 불상이 필요없습니다. 법을 못 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불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를 표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만일 법을 통찰한 사람이라면 차 안에서도 부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여행기 안에서 나무 아래서 배 아래서 어디서든지 부처님을 뵐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뵙고 싶습니까?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신다면 사성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성제를 알고 보기위해서는 집중력을 계발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집중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집중력, 선정, 사마디를 완성하지 못하고, 아무도 번뇌를 버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중력, 삼매를 완성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희망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집중력이 있는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중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다른 말로 성인의 경지,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고서 누구도 부처님을 볼 수 없다.

육안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은 부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통찰지로서 법을 보는 사람이 부처님을 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마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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